2014년 7월 27일 일요일

자기 주도적인 삶과 행복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맥을 같이 한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비롯되고, 오늘 내가 하는 행위가 '미래의 나'를 규정한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좋든 싫든, 과거라는 원인이 현재라는 결과를 규정하고, 현재라는 원인이 미래라는 결과를 결정짓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하나의 컨텍스트를 정의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 컨텍스트 안에서 일관성 있게 행해지는 모든 행위들을 정의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기 주도적인 삶은 그 컨텍스트를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 대로 정의하고 그 컨텍스트에 부합하는 형태로 우리의 삶을 꾸려가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준다?
실제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우리는 과정보다는 결과에 더 집착하는 사회를 살아내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일관성 있는 컨텍스트 보다는 바로 지금, 현재라는 결과에 더 집착한다. 성공의 개념이 보다 물질화 되고, 물질적 토대 위의 성공이 행복과 동일시 되고 있다. 부와 명성을 쌓기 위해 저질러지는 온갖 탈법, 불법은 결과가 좋으면 그럴 수 있는 일로 불문에 붙여진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들의 상식이 되고 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개인 재산을 축적하거나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만드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정치인으로서 존경할 수 있을까. 어느 회사의 사장이나 임원이 여러가지 편법으로 탈세와 반칙을 일삼고 아랫사람들을 착취하면서 그 결과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사람을 존경해도 괜찮을까. 주어진 권한을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교육 받아왔던, 의심의 여지 없이 당연시 여겨왔던 상식들이다. 지금은 그 상식들이 깨지고 있다.

우리는 반칙을 하지 않으면 승자가 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종종 TV를 통해 방영되는 청문회를 통해 소위 사회적으로 많은 존경과 대우를 받아왔을 그들의 위장전입, 업다운 계약서, 탈세, 병역 기피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민낯을 보게된다. 청문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이 곧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바이블인 셈이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반칙을 사용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고 어느 정도 용인되는 세상이다. 어느 회사의 중역이라는 이유만으로, 국회의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들을 성공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아낌없는 존경과 부러움의 눈길을 보낸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과 국회의원으로서 사업가로서 그들이 어떤 가치를 창출해 내고 있는 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들과 끈을 대기를 원하고, 혹시나 그들과의 인연이 나중에 어떤 이득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끈을 가진 누군가를 부러워한다. 

어른들은 청소년들에게 판사, 변호사, 의사가 되라 한다. 우선은 먹고 살 걱정없고, 사회적으로도 존경받을 수 있는 직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동안 대한민국에는 사회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몇몇 직업군들이 생겨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자신의 권력과 부를 정의롭지 않게 사용하는 것을 종종 목도한다. 우리는 그들의 무소불위 권력을 비판하고 부패에 치를 떨면서도 한편으론 자기 자식들은 그러한 직업을 가지도록 원하고 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 직업이 왜 좋은 직업인지를 알려주고 어떤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기 보다는, 우선은 신분 상승의 사다리는 오르고 볼 일이라는 이중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 자식 만큼은 사회적 강자가 되어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누구나 관심 받고 싶어하고 사람들의 중심에 서고 싶어하는 욕망을 안고 산다. 좋은 차를 몰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 그리고 누가 봐도 크고 번드르르한 회사에 다니는 것. 이러한 욕망들이 단지 자기 만족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군가가 바라봐 주고 알아줘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주변 사람들로 부터 반응을 얻고 존경 받음으로써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준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도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여지껏 우리는 그래왔다.

의미를 찾는다는 것의 의미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 질문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우리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살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 행위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그 당위성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컨텍스트에 부합할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행위일 때 그 결과에 대해 우리는 기꺼이 책임을 질 수 있으며 일을 추진하기 위한 강한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다.

요즘 ICT분야에서는 젊은 세대의 창업 열기가 그 어느 때 보다 뜨겁다. 정부의 창업지원센터를 통한 지원은 차치하고라도 민간차원의 창업생태계도 활발하게 구축되고 있다. 프라이머, 패스트트랙아시아, 케이스타트업과 같은 엑셀러레이터와 초기 사업에 투자하는 본엔젤스나 케이큐브벤쳐스와 같은 VC가 생겨나고, Series  B이상에 투자하는 무수히 많은 VC 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스타트업에게 허브역할을 제공해 주는 디캠프, 마루180, 스타트업얼라이언스등도 빼놓을 수 없다(1 page로 보는 한국의 창업생태계 참조). 대학을 다니고 있거나 갓 졸업한 젊은 세대부터 어느 정도 직장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 맞는 사람끼리 의기투합하여 창업에 도전하고 있다. 사오정이 일반화되어 있는 ICT분야에서는 사십대를 훌쩍 넘긴 많은 직장인들도 어렴풋하게 나마 한번쯤은 창업에 대한 고민을 해 봤을 것이다.



이러한 창업 물결은 애플이 바꾸어 놓은 ICT 산업생태계의 변화와 7%를 훌쩍 넘는 높은 청년실업률(통계청, 2013)이라는 경제상황이 맞물리면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실리콘 밸리에서 들려오는 몇몇 스타트업의 성공 스토리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청년들의 보다 도전적인 목표를 향한 질주에 박수를 쳐 줄 수도 있으나 어떤 면에선 그들에겐, 막다른 골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 이유야 어떻든, 도전하고 고생한 만큼의 결과가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조금 오래된 자료긴 하지만, 2012년 2월 기준으로 스마트 컨텐츠 개발업체현황을 보면, 10인 미만의 영세사업장이 전체의 49.5%이고, 1인당 연간 매출액이 2000만원정도에 불과하다(모바일 컨텐츠 이야기 참조). 2014년인 지금도 그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며 창업을 하지만 사실 그들 앞에는 짚을 지고 불속을 뛰어드는 것과 같은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만일 창업에 도전하는 이의 동기가 오로지 실리콘 밸리의 성공한 사람들 처럼 '대박'을 터뜨리고 싶다거나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떠밀려 아무런 비전 없이 선택했던 것이라면, 사업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들은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게 될 것이다. 사업이 어느 정도 순항을 한다 하더라도, 사업의 규모가 커지고 서서히 많은 돈을 만지게 됨에 따라 점점 탐욕의 늪으로 빠져들게 될 가능성이 높다(미국 월 스트리트의 전 해지펀드 트레이더인 Sam Polk가 NYT에 기고한 "돈 중독"에 관한 경험담). 그 과정에서 그들은 탈세와 반칙을 일삼는 또 한명의 악덕 기업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각각 예일대와 스와쓰모어 컬리지(Swarthmore Colleage)에서 조직 행동이론과 심리학을 연구중인 Amy Wrensniewski와 Barry Schwartz는 미국 West Point의 군사학교 사관생도를 대상으로 한 내적 동기(internal motive)와 외적 동기(instrumental motive)에 대한 실험을 통해, 내적 동기를 더 많이 가질 수록 성취도가 높고 조직에 더 오래 복무하는 경향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내적 동기란 행위의 본질과 관련된 동기를 의미하고 외적 동기란 그 행위의 결과로 인해 얻어지는 부산물 즉, 재물이나 명예 따위와 같은 동기를 의미한다. 

결국,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강한 내적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행위 또는 선택에 대한 강한 내적 동기를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선택은 어디 까지나 바로 "나"에 의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른 선택이어야 한다.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옷을 소유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그러한 소유의 동기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거나 타인으로 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 어떤 외적 동기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닌 것이다. 판사, 변호사, 의사가 되는 것이 사회/정치/경제적 배경에 상관없이 법 앞에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 실현을 통해 약자를 보호하고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하기 위한 내적 동기라면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경쟁사회에서 안정적인 고지를 우선 점령하고 남 부럽지 않게 살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닌 것이다.


자기 주도적인 삶과 행복
요리책을 달달 외운다고 요리사가 될 수 없듯이, 남을 웃기는 101가지 방법과 같은 책만 읽어가지고는 개그맨이 될 수 없듯이, 행복에도 고된 훈련이 필요하다. 

우선은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의 성공을 타인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망, 타인으로 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은 욕망, 나보다 잘 나가는 옆사람에 대한 질투, 비교하는 버릇. 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남들 보다 더 잘 되고자 하는 욕망을 내려 놓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나'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나와 남을 비교하는 순간 우리는 불행해 진다. 미국 기업협회 의장인 C. Brooks는 NYT기고를 통해 인간의 불행(unhappiness)은 물질적인 것을 놓지 못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해야하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언제 보람을 느끼는지, 언제 분노를 느끼는지,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 지, 개인적/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 싶은 지등과 같은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나'를 이해하는 과정은, 어쩌면 생각보다 긴 여정일 수 있다. 인생을 살아 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낯선 나'와 마주칠 때가 많다.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어찌됐든 그 조차도 나의 모습이다. 기나긴 여정에서 가급적 많은 직/간접 경험을 통해 서로 다른 모습의 나를 많이 만나보는 것도,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 하다.

마지막으로는 비전을 가지는 것이다. 비전을 가진다는 것은 나의 행복을 정의하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나'의 존재가 타인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유의미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보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도저히 모르겠고 아직 나이가 젊다면, 일단 뭐든 도전해 보는 것도 좋다. 직장인의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형편이 닿는 대로 첫 직장을 선택하고, 일단 취직이 되면 나름대로 적응하며 흥미를 찾아간다고 한다. 무엇이 되었든 적응하며 흥미를 찾아갈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만 있다면 그 자체로 성공적인 삶이라 말하고 싶다.


의 성공과 행복은 누가 대신 정의해 주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 바라보는 성공과 행복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당신은 결코 당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대학에서 부모가 원하는 학과를 선택하고, 부모가 원하는 직업을 살아가고 있다면 당신은 부모의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구입한 외제차에 주변사람들이 열광하고, 당신이 그로 인해 희열을 느끼고 만족해 한다면, 당신은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주고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성공한 직장인으로서 주변 사람들이 당신이 내미는 명함을 받기 위해 달려드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낀 다면 그 역시 당신의 행복은 아니다. 행복이라고 느낀 그 모든 감정이 사실은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행복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당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부터 흘러나와 온 몸에 베어들고 마침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성공과 행복은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을 때라야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흔히들 인생을 한 편의 연극에 비유하곤 한다. 사람들의 시선과 조명을 한 몸에 받는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내가 맡은 그 배역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그로인해 지금 현재 즐거울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주어진 삶을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행복한 마음은 긍정적인 마인드를 낳고 대체로 긍정적 마인드는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

다음에 책을 읽는 동안 다가왔던 몇 가지 구절들을 추려서 정리하였다.
  •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나는 그것이 품위있는 인생, 존엄한 삶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p24
  • 내 문제는 꿈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무엇인가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었다. 인생을 어떤 색조로 꾸미고 싶다는 소망도 없었다. 그저 현실에 잘 적응했을 뿐이다. p33
  •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들고 능동적으로 세상과 부딪치지 못했다. 번민하면서 주저하는 내게, 세상이 먼저 부딪쳐 왔다. 세상은 나더러 체념하거나 굴복하라고 했고, 나는 거절하고 저항했을 뿐이다. p34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p37
  • 어차피 죽을 것이기 때문에 삶은 허무하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틀린 말이다. 그 역이 옳다.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 p47.
  • 삶의 의미는 사회나 국가가 찾아주지 않는다. 찾아줄 수도 없고, 찾아주어서도 안된다.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할 경우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p51
  • 상처받지 않은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p56
  • 삶의 '위대한 세 영역'은 사랑, 일, 놀이이다. 이것은 당위가 아니다. 이 셋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실제 이 셋으로 삶을 채우며, 여기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 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위대한 세 영역'이라고 하는 것이다. p61
  • 사실 누가 그걸 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내 스스로를 가두어 버려서 그렇게 되었다. p63
  • 자살을 용기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삶도 용기만 있다고 해서 마냥 잘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사는 데도 죽는 데도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삶의 그리고 죽음의 의미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이 없으면 삶도 죽음도 주체적 선택일 수 없다. 삶은 습관이고 죽음은 패배일 뿐이다. p83 
  • 그러니 먼 훗날, 또는 긴 역사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내 스스로를 느낄 수 있는 행동으로 내 삶을 채우는 것이 옳다. 그러니, 내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살자.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말자. 내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꼭 그만큼만 내 죽음도 의미를 가질 것이다. p90
  •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잊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할 것은 오직 하나이다. 살아있는 동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p104
  • 살든 죽든,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p139
  • 무엇인든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고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 삶에 주는 기쁨과 의미를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146
  • 만약 직업으로 하는 일이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이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다. p166
  • 즐기는 게 아니라 이기기 위해 일하게 되면, 이겨도 남는 게 없고 최악이 된다. p171
  • 열정과 재능의 불일치는 회피하기 어려운 삶의 부조리이다. 재능이 있는 일에 열정을 느끼면 제일 좋다. 그러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기만 하다면, 재능이 조금 부족해도 되는 만큼 하면서 살면 된다. 경쟁은 전쟁이 아니다. 져도 죽지 않는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것으로 인생을 산다. 가진 것이 많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다. 적게 가져도 행복할 수 있다. 끝없는 경쟁속에 살아야 하지만,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면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p174
  • 나는 직업정치를 떠나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기쁘게 연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눈앞을 가리고 있던 두터운 먹구름이 걷했다. 해방감으로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p195
  • 부부는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으며 성장기의 공통적인 경험도 없다. 헤어지면 바로 남이 된다. 부부 사이의 책임의식과 유대감은 사랑 위에서만 튼튼하게 유지된다. 사랑이 없어지면 조만간 책임감도 약해진다. p209
  • 무엇이든 쓰려면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고, 내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 느껴야 한다. 쓰는 일은 비우는 동시에 채우는 작업이다. 배움과 깨달음이 따라온다. p237
  • 신앙이나 이념은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을 갖추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신념은 삶을 풍요롭고 기쁘고 의미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이념의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p275
  •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름을 남긴다는 것의 본질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한 행위,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든 그 사람의 마음이다.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석가모니도, 예수도 이름을 남길 목적으로 살지 않았다. 모두 스스로 설계한 삶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다 죽었을 뿐이다. p329

Red Mouse

2014년 5월 27일 화요일

[도서리뷰] 감정수업(4)

감정은 서로 뒤섞인다. 때로는 서로 비슷한 감정들이, 때로는 서로 모순된 감정들이 서로 부딪힌다. 서로 얽혀있는 감정의 고리를 따라 들어가다보면 그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본질에 닿을 수 있다. '자아'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본질에 닿는 과정. 이것이 명상이고 성찰이 아닐까. 마음안에 쉼없이 흘러다니는 구름을 관찰하며, 그 구름 사이로 해가 비추는 찰나를 잡아내는 것. 그렇게 우리는 나를 발견한다.

강신주 님의 감정수업을 읽고 올리는 마지막 포스팅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지난 3주간의 사유의 시간이 즐거웠다. 앞으로 몇 년 아니 십 수년이 지난 후, 지금의 이 포스팅들을 되돌아보는 시간도 즐겁지 않을까. 

이 글은 전적으로 나의 시각이므로, 감정수업에서 다루고 있는 실제 내용과 같을 수도, 많이 다를 수도 있으니 읽는 분들이 오해 없으시길.

서른 일곱번째 감정에서 마흔 여덟번째 감정까지:


37. 후회: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뒤늦은 반성.
우리는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또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하며 살아갈까. 후회라는 감정은 과거의 잘못된 선택과 행동에 대한 슬픔이다. 그것은 다시 과거의 그 시점으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하리라는 전제를 가진다. 과거의 잘못이 오늘의 트라우마로 남아 우리의 마음을 슬픔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회한'이라면, 후회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함께 미래에는 좀 더 나은 선택을 하리라는 의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물론, 나약한 우리는 똑같이 잘못된 선택과 실수를 종종 반복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할 수 있다는 것은 좋게 해석될 수 있지도 않을까. 그것은 '적어도 아직은' 우리의 정신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상태에 머무르고 있음을 의미할 테니 말이다. 

동일한 잘못에 대한 반복된 후회는 우리를 무디게 한다. 반복된 후회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참담함을 느끼게 하는 대신에 때때로 합리화의 길을 선택하게 한다. Why Not? 이라고 스스로에게 외치며 그 실수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한다. 한 때 예민했던 우리의 도덕적 감성은 그렇게 나이가들 수록 무뎌져 가는 건지도 모른다. 후회의 감정을 발전적으로 풀지 못하면, 우리는 그냥 그런 삶을 살다가 먼지와 같은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38. 끌림: 관계의 시작.
모든 사랑은 끌림에서 시작한다. 끌림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홀로 완벽할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인 다면, 누군가에게 끌린다는 것은 상대방이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렇게 서로 부족하고 남는 부분을 합쳐 우리는 서로를 완성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좀 더 완전하게 하고 삶을 좀 더 충만하게 채워줄 수 있는 누군가를 늘 기다린다. 그래서 끌림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가 바로 '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우리의 끌림은 끌림으로 끝나버리곤 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매력이 나에게 충분히 지속가능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섹시한 여자에게 우리는 끌린다. 하지만, 그 사람이 알고보니 명품백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떨까? 키크고 잘생기고 목소리 좋은 '훈남'에게 우리는 끌린다. 하지만, 그 사람이 다혈질에 폭력적인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면 어떨까? 사랑이 대상의 총체적 이미지에 대한 감성적 반응이라면 끌림은 그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 그래서 끌림의 감정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누군가에게 끌리고 있는 당신은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섰을 뿐이다.

39. 치욕: 타인의 나를 향한 비난으로 인한 스스로에 대한 슬픔
당신은 본인의 약점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누군가가 그 약점을 건드려 당신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는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산다. 그 약점은 신체적인 것일 수도, 과거의 어떤 사건일 수도 또는 배경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나의 약점을 공격당했을 때, 대부분의 우리는 저항할 수 없는 무력함을 느낀다. 어쨌거나 그들의 비난은 사실에 근거할 것이므로, 반박할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물리적으로라도 상대방을 제압하고 싶지만, 사회생활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아니다.

우리 안에 치욕이라고 생각되는 그것을 다시 한번 꺼내보자. 그리고 본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같은 약점 또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사람에게 당신이라면 뭐라고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치욕의 감정은 내 안에 치욕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대상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이다. 치욕의 감정은 밖으로 향하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안에 감춰져 있는, 스스로 수치스럽다고 단정해 버린 그 뭔가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 대상을 우리가 치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생길 수 없는 감정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당신이 치욕이라고 생각하는 그것. 사실은 많은 사람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두 다르지만, 비슷하기도 하니까.

40. : 맞서기 두려워 욕망을 포기하는 마음
과거에 겪었을 어떤 직접적인 경험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한 간접적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 때때로 겁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망, 방어기재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겁은 필요해 보인다. 경우에 따라 심지어 현명해 보이기 까지 하다. 길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단 난투극의 현장을 목격했을 때, 그 안에 뛰어들어 그들을 말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폭락하는 주식을 바라보며 모든 투자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홀로 낮아진 가격에 대량의 주식을 매입하는 것이 반드시 뛰어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겁은 불확실한 미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이 보내는 시그널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 다른 경우, 겁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를 대상으로 하곤 한다. 우리의 본능이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여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도전에 실패를 많이 한 사람일 수록 다가오는 도전에 대한 겁이 많아진다. 반복된 실패가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자신감을 상실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우리는 포기한다. 존재하지 않는 귀신 때문에 우리는 겁에 질리기도 한다.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새로운 사람과 만나기를 두려워한다.  겁의 감정은 모름에서 시작한다.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나는 왜 과거에 사람으로 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는지, 왜 도전에 실패했는지, 왜 사랑에 실패했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겁을 극복하는 것은 자기를 앎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41. 확신: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상태
확신이라는 감정은 어떤 상태 또는 상황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어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가 명확해 질 때 생긴다.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성에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경험이나 이런저런 지식을 활용한다. 하지만 나름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확신에 가득 차 뭔가를 했다하더라도, 그 결과는 종종 우리가 원하던 바와 다르게 나타나곤 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확신과 의심사이를 저울추 처럼 움직이며" 살아간다. 늘 갈등하고 고뇌하며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최대한 예측가능한 미래를 만들어내고자 하지만, 행동의 결과와 그 결과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성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확신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그 확신조차도 어쩌면, 단지 내가 가진 협소한 경험들과 지식의 파편들로 짜맞춰진 정당화된 허구일 수도 있을 테니. 이것 저것 모두 따져가며 타이밍을 놓치기보다 가끔은 본능에 충실하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본능에 따른 선택이 가급적 맞는 선택이었기를 바란다면 평소에 충분한 고민을 통해 그 분야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도록 하는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42. 희망: 불확실한 기쁨.
희망은 미래의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보다 그것으로 인해 설레이는 감정에 촛점을 맞춘다. 희망은 오늘 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내는 긍정의 감정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삶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감정에 맞서, 인간으로 하여금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강제한다. 그래서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엔진이다. 나의 삶에 행복이 찾아올 확률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되는 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아직 놓지 않았다는 것 만으로도 우리의 미래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니까.

희망이 없는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루하루의 삶이 만족스러움에 가득 차 있는 사람조차, 그러한 일상이 변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이들에겐, 언젠가 그들의 일상에도 따스한 햇살이 내리쬘 수 있기를 '희망'한다. 희망하는 미래를 현재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세운다.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미래로 바꾸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고군분투 한다. 그래서 희망은 미래라는 보이지 않는 객체를 바라보는 시선이고 또한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희망이라는 횃불을 들고 전방을 응시하며 한 발자욱씩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삶이다. 희망을 놓으면 길을 잃는다.

43. 오만: 자기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
'겸손'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낮춤으로써 타인에 의해 높여지는 것이라면, '오만'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 타인에 의해 낮춰지는 것이다. 오만한 사람은 타인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에 누군가가 토를 다는 것을 싫어하며, 단순한 의견 조차도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인생에서 실패한다. 오만한 그들은, 사실은 나약한 존재다. 자신의 나약함을 지나친 자신감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포장된 자신감이 종종 타인으로부터 반향을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만함은 인간관계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나약한 사람들이 가지는 감정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정작 그 오만함으로 그들 가운데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고 느꼈을 때, 정작 자기 주위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44. 소심함: 두려움의 대상을 확대하여 바라보고 회피하는 것.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즈음 세상의 그림자를 바라본 적 있는가? 소심한 마음이 바라보는 세상은 그렇게 길에 늘어져 있는 그림자들의 세상이다. 세상에 대한 그들의 시선은 당당하게 세상의 정면을 응시하기 보다, 저물어가는 해가 세상을 바라보듯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그림자의 크기 만큼이나 과장되어 있다. 소심함은 그렇게 바깥세상의 두려움을 확대하여 마음안에 투영시킨다. '겁'이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라면 '소심함'은 보이는 대상에 대한 확대된 두려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확신 보다는 의심이 많다. 맞서기 보다는 회피하고, 잊기 보다는 기억한다. 그들은 늘 신중하기에, 돈키호테와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그들의 인생에서 크나큰 승리감은 맛보지 못하리라. 

당신은 소심한가, 대담한가? 대부분의 우리는 그 중간 어디 즈음에 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몸을 던질 수 있는 대담함과 위험에 대한 방어본능으로 부터 오는 소심함. 그 가운데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45. 쾌감: 몸과 마음이 상호작용하여 완전한 기쁨을 만드는 상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육체적 쾌감. 그것은 아마도 수십만년을 이어온 인간의 본능이리라. 커다란 성취로부터 오는 정신적 쾌감. 인간이 그것으로 부터 의미를 찾기 시작한 역사는 육체적 쾌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을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쾌락을 하나로 조화롭게 구현할 수 있을때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 육체적 쾌감이 정신적 쾌감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그 둘이 동일한 컨텍스트에 있음을 의미한다. 정신적 쾌감과 육체적 쾌감은 그 어느 것이 가치우위에 있지 않을 만큼 모두 중요하다. 육체적 쾌감과 정신적 쾌감은 서로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시너지를 가지기 때문이다.

늦은 밤 강남이나 압구정의 룸싸롱 거리를 둘러보자. 술취한 남성들을 유혹하는 네온사인과 바닥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찌라시들, 그리고 삐끼들의 얘기는 새삼스럽지 않다. 자신들의 육체적 쾌락을 위해 봉사해 줄 여자들을 만나기 위해 한 두시간의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는 군중들과 그들에게 성을 파는 여성들은 어디를 가나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들간에는 어떤 컨텍스트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육체적 쾌락에 대한 집착만 있을 뿐이다. 육체적 쾌감과 정신적 쾌감사이의 연결고리가 깨져있는 모습들이다.

정신적 쾌감과 육체적 쾌감이 조화를 이루는 좋은 예는 뮤지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악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박자와 선율은 뮤지션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그들의 몸은 음악이 만들어 내는 선율에 맞춰 흔들리고, 그들의 심장은 박자에 맞춰 박동한다. 뮤지션은 음악을 만든다. 하나의 곡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들은 기꺼이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운다. 영감을 얻기 위해 그들은 몸부림 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곡에 다시 몸을 싣는다. 그들의 정신적 쾌감과 육체적 쾌감은 음악이라는 하나의 컨텍스트 안에서 통일을 이룬다. 우리는 이렇게 의미있는 컨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자기 삶의 뮤지션이 되어야 하고, 그 안에서 정신적, 육체적 쾌감을 통일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약한 우리는 종종. 그 연결고리를 잊곤 한다.

46. 슬픔: 큰 행복과 작은 행복을 비교하는 데서 오는 박탈감.
슬픔은 비교하는 행위로부터 시작한다. 나의 현재를 타인과 비교하거나 또는 행복했던 과거와 비교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덜 행복한 현재의 나를 자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나보다 사회/경제적으로 소위 '잘 나가는' 타인과 비교하는 것은 우리를 박탈감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들이 이미 나보다 좋은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박탈감에 빠진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현재가 대물림되어, 그들의 아이가 다시 한번 나의 아이를 압도할 것이라는 불운한 미래에 좌절한다. 

우리는 나보다 더 넓은 집에 사는 사람, 더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 더 좋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 더 큰 회사에 다니는 사람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한다. 우리는 그렇게 타인이 말하는 행복의 기준에 마음을 빼앗긴다. 내 맘 속의 나는 설 곳을 잃어 마음 한 귀퉁이에 초라하게 쪼그리고 앉아있다. 나를 잃은 나는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비교에서 오는 슬픔을 극복하는 것은 '자아'를 찾는 데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타인이 나에게 원하는 삶이 아닌, 내가 나에게 원하는 삶을 찾아야 한다. 타인이 말하는 행복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행복을 찾아야 한다. 타인이 말하는 그들의 삶의 의미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내가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때, 우리가 비교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47. 수치심: 타인에게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사회적 관계에서 나의 행동에 대해 수치심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도덕적 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비난에 대해 두려워 하는 감정이 '치욕'이라면, 수치심은 스스로에 대한 비난을 의미한다. 그래서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도덕적 양심에 거리끼는 어떤 행위를 스스로 하지 않는 것, 스스로에게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 것. 모두 어떤 면에서는 용기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끔 청문회를 보게된다. 청문회는 국가의 행정을 이끌어가기 위한 각 부처의 수장이 될 사람들을 평가하는 자리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취를 통해 이름을 얻었거나 또는 능력을 검증받았던 사람들이고 또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청문회를 통해 소위 사회적 명망가들인 그들이 어떻게 부를 축적해왔고 본인의 기득권을 어떻게 남용해왔는 지에 관한 민낯을 보게 된다. 그들의 민낯은 곧 그들을 명망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우리들의 민낯이기도 하다. 그들을 보며 종종 궁금해 지곤 한다. 미안하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말하는 그들은 정말로 수치심을 느끼고 있을지. 아니면 그것 조차 연기일지.

48. 복수심: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복수심은 "우리에게 해악을 가한 자에게 똑같은 해악을 가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복수심은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몸부림이자 개인적 결단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 복수가 상처를 낫게 할 것이라고. 복수를 위한 여정에, 나는 심판관이자 집행자이기를 자처한다. 복수심은 나의 마음을 대상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가득 채운다. 거기엔 도덕적 양심도, 수치심도, 두려움도 없다. 복수심의 대상은 내 안에서 하루에도 열두번 난도질 당하고 갈기갈기 조각내어 진다. 거기엔 '나'가 아닌 또 다른 '나'가 존재할 뿐이다. 

복수심의 끝은 자멸 뿐 이다. 내 마음안의 대상을 해체하는 과정은 곧 자아를 해체하는 과정이다. 해체된 자아가 흉물스러운 괴물로 다시 태어난다. 이성과 감정의 균형점을 잃은 나의 모습.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돌연변이에 가깝다. 이성과 감정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나의 복수심은 행동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행동의 끝은 곧 사회적 관계, 사회적 삶의 끝을 의미한다.



Red Mouse

2014년 5월 21일 수요일

[도서리뷰] 감정수업(3)

평소에는 그저 지나쳐 갔을 내 안의 감정의 흐름들이 요즘들어 색다르게 다가온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이면을 들여다 보려고 하고, 그 감정이 어디서 오고 있는지를 사유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참으로 단순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에 대해 새삼 눈을 뜨게되는 시간들이다. 그러고보니, 자연의 현상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 만큼이나 사람의 현상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도 참 재미있어 보인다. 이번 포스팅은 강신주님의 감정수업을 읽고 올리는 세번째 포스팅이다. 

이 글은 전적으로 나의 시각이므로, 감정수업에서 다루고 있는 실제 내용과 같을 수도, 많이 다를 수도 있으니 읽는 분들이 오해 없으시길.

스물다섯번째 감정에서 서른 여섯번째 감정까지:

25. 감사: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 대한 마음의 표현
사회에 첫발을 디디면서 부터 우리는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 전장터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포용하는 법 보다는 아수라 같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각종 비법과 노하우에 귀를 기울인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고 있어 조금이라도 한 눈을 팔면 금새 뒤쳐지는 세상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출퇴근 하는 사람들의 무표정 이면에는 하루 하루를 헤쳐나가기 위한 고민들이 묻어 난다. 그래서 요즘 같은 세상엔 누군가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쓴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도와주기 위해 자신의 귀중한 마음을 할애해 줬음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은  상대방의 마음 써 줌에 대해 우리가 가지게 되는 감정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냉대와 개인주의, 경쟁으로 폭발직전인 우리를 진정시킨다. 치열한 경쟁에서 남을 밟고 올라서는 방식이 아니고서도 남에게 친절을 베풀고 마음을 열어보이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인식될 수 있고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누군가의 남편과 아내로, 이성친구로, 아빠 엄마로, 선생님으로, 동료와 선후배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 만으로, 우리는 적어도 그들의 주인공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가 있는 것은 '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가 있어 주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26. 겸손: 나약함과 무력함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자신감의 표현
겸손은 실제보다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다. 그래서 실제로 나약하고 무기력한 사람은 겸손할 수 없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더 낮출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겸손은 부, 명예,권력 또는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그러한 외피론적 허무함을 깨닫고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다. 무대에서 청중들을 휘어잡던 가수가 객석으로 내려왔을 때 청중들의 반응을 본 적이 있는가? 무대에서 늘 바라봄의 대상이었던 그 사람이 바로 내 옆에 있어 이제는 만질 수 있고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더욱 열광한다. 겸손은 그런 것이다. 나를 낮추어 상대방과의 벽을 허무는 것.  겸손은 스스로를 주인공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겸손은 그 주인공을 더욱 위대하게 한다. 

하지만, 주의하자. 겸손하고자 하는 우리의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이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방이 약해보일 때를 기다렸다가 밟고 올라서려는 무리의 사람들이다. 그런 그룹의 사람들은 상대방의 약점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한번 잡은 약점도 결코 놓지 않는다. 경쟁사회에서 겸손할 수 있으려면 어떠한 이유로든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자.

27. 분노: 자존감에 해악을 끼치는 대상에 대한 미움.
인간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 있는 대상에 대해 강한 연대감을 가진다. 연대감은 나약한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나와 같은 공동체에 속한 이가 핍박을 받고 존엄을 무시당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부당함이 우리 자신에게 가해지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는, 농민은, 철거민은, 노점상은 또 다른 인간의 그룹인 자본가에 대항한다. 군사독재와 민주 세력이 충돌하고 진보와 보수가 충돌한다. 약자는 정치세력화를 위해 몸부림치고 강자는 그들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우리는 약소국간의 전쟁을 부추기는 강대국을 보며 분노하고, 시민들이 부여한 권력을 남용해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 부패한 정치인을 보며 분노한다. 우리는 철거용역 깡패들을 수수방관하는 경찰들에 분노하고, 남북대치와 같은 국가적 긴장감을 자신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세력에 분노한다. 분노는 우리가 약자이기 때문에 가지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99%의 감정이다. 99%의 분노가 세상을 바꾸고 99%의 시민이 역사를 움직인다. 분노의 감정은 세상을 바꿀 만큼 강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자존감이 짓밟혔을 땐 언제든 분노하자. 분노의 감정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28. 질투: 타인의 행복으로 인해 내가 불행해짐을 느낄 때 가지는 감정.
질투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어떤 대상에게 가지게 되는 감정이다. 그 대상은 부나 명예, 권력과 같은 물질것을 소유한 사람일 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보일 때와 같은 것 일 수도 있다. 질투는 관계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유발한다는 면에서 부러움과 구별된다. 부러움은 부러움의 대상을 쟁취하기 위해 좀 더 노력하도록 나를 충동질하고 동기를 유발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질투는 동기부여 보다 박탈감을 더욱 느끼게 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이다.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질투를 느끼게 행동을 하는 것은 긴장감을 유지시킬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간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지금은 내 옆에 있지만 그 사람이 언제든 내게로부터 등을 돌릴 수 있다는 불안감. 두 사람이 만나 서로 마음의 평화를 얻어 완전해 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불안한 상태가 이어진다면, 굳이 왜 만나야 할까. 이성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질투심을 느끼게 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서로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바란다.

이성관계가 아닌 사회적 관계에서 누군가에게 질투심을 느낀다면 그 질투의 대상에 대해 돌아봐야 한다. 그 대상이 나보다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물질적 배경이라면 질투심은 본인의 자신감 결여에 기인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가진 그 무엇을 당신은 쟁취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는 자괴감인 것이다. 사실은 그 이전에 당신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 그의 외피를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교하지 말자. 관점을 바꾸자. 상대방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부러워 해 주자. 그래야 당신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29. 적의: 우리들이 미워하는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도록 자극하는 감정.
적의 또는 적개심을 가지는 것은 대상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적'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적의를 가진다는 것은 대상과 내가 더 이상 타협점에 이를 수 없거나 그럴 마음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 적개심의 대상에게 우리는 물리적, 정신적 타격을 가한다. 이러한 해악은 소위 '소심한 복수'에서부터 정치적 음해까지 그 경우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사람에게 쉽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을 주의하라. 직장에서 뛰어난 후배가 성장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불이익을 주는 사람, 종종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대상에게 물리적, 정신적 해악을 습관처럼 가하는 사람.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보다 물리적 해결책을 더 선호하는 사람. 마음속의 적의를 합리적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휘두르는 칼이 누구를 향하고 있고 누구에게 상처를 줄 지를 걱정하기보다는 본인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덩이를 잠재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있으려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를 변화시켜 함께 살거나, 아니면 그가 휘두른 칼에 맞아 죽거나. 

30. 조롱: 대상을 낮춤으로써 나를  높이려는 감정.
대상을 조롱하는 감정은 그 대상보다 자신이 더 높이 있다는 우월감을 전제로 한다. 누군가를 조롱하는 자의 마음은 그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으로 가득차 있다. 그들은 자기가 더 우월하다는 감정을 스스로에게 강제함으로써 시기와 질투심을 극복하려 한다. 그리고 그 우월함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대상을 조롱하고, 조롱받는 대상이 침묵하거나 얼굴이 벌개져 고개를 숙일 때 만족을 느낀다. 누군가를 조롱하는 사람은 그래서 자존감이 매우 낮은 사람이다. 직장에서는 실력 없는 상사이거나, 학교같은 곳에서는 찌질한 무리의 골목대장 쯤 될 것이다.  그들의 내면은 매우 나약하고 비겁하다.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한 사람들 앞에서는 비굴하리만치 무릅을 꿇고, 자신 보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우월함을 증명하고자 애쓴다. 

영어를 유난히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에서, 백인앞에서는 몸을 베베꼬며 실없는 눈 웃음을 보내고 무한한 친절을 베푸는 어떤 이들이 동남아시아인이나 중동인들에게는 눈을 내리깔며 무표정한 것을 목격한다. 인종 차별이라는사회적 지탄을 피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그들을 조롱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가슴속에는 본인들이 속한 한국인의 몸값이 백인보다는 낮고 동남아인들 보다는 우월하다는 감정에 지배당해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을까. 모국어가 영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고 중산층 정도의 삶을 영위하는 백인 중 상당수가 사실 모국에서는 무직자이거나 능력을 검증받지 못한 채 떠돌며 이런 저런 잡일들을 하던 사람들이었고, 한국에서 대우도 못받고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낮은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어떤 동남아인들은 모국에서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망명 신청을 해 온 최고급 지식인들이라는 것을.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속한 그룹이 나의 가치를 대변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내가 정말 내가 속한 그룹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31. 욕정: 성교에 대한 욕망
섹스는 두 남녀가 소통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섹스가 대화와 구별되는 것은, 의미있는 섹스는 사랑하는 관계에서만 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대화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마음을 합치는 것이라면, 섹스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몸을 합치는 것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이 모두 합쳐질 때 보다 완성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대화를 통해 섹스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완성되고, 섹스는 대화의 깊이를 더한다. 대화와 섹스는 그렇게 선순환한다. 이런 이유로, 남녀간의 육체적 관계는 서로간의 존중과 신뢰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정신적 교감이 없는 육체적 관계는 쾌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육체적 관계가 없는 정신적 교감은 감정적 유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클럽에서 원 나잇 스탠드를 위해 이성을 찾는 사냥꾼들. 그리고 그들에게 몸을 맡기는 사람들. 그들간에 사랑이 싹 틀 가능성은 높지 않다. 섹스를 육체적 쾌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바라보는 서로를 사실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이들과 쾌락을 댓가로 몸을 던지는 그들 중 누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32. 탐식: 먹는 것에 대한 지나친 욕망.
산해진미가 품고 있는 맛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큰 즐거움 중 하나다. 탐식은 그 즐거움에 대한 욕심이 과하여 품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젊은 시절 수양했던 Zen불교의 영향을 받아 금식을 생활화했다고 한다. 정신을 항상 맑게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수도승들은 맛의 즐거움을 멀리하기 위해 매운 것, 짠 것, 단 것등을 멀리한다고 한다. 육체의 즐거움을 멀리함으로써 신께 좀 더 가까워 지기 위함이 아닐까. 우리들이 그렇게 수도승처럼 살 필요야 없겠지만 가끔은 그렇게 육체적 즐거움을 멀리해 보는 것도 필요하리라. 운이 좋다면 육체적 즐거움 보다 더 좋은 뭔가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탕이 가득 들어 있는, 입구가 좁은 유리병에 손을 넣고 양껏 집었을 때 손을 뺄 수 없는 것 처럼, 가끔은 마음을 내려 놓아야 이루어질 때가 있지 않을까. 

33. 두려움: 과거의 슬픔이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감정.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언자와 점쟁이에 의존하고, 종교에 심취한다. 불확실성은 인간에겐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기인한다. 실패를 많이 한 사람일 수록 미래를 비관하고 성공을 많이 한 사람일 수록 미래를 낙관한다. 우리가 과거의 경험을 미래에 투영시키는 방식이다. 미래가 두렵다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미래가 설레인다고 하는 사람들. 그런데 실은, 이 설레임과 두려움 모두 내 안의 감정이 만들어 내는 허상이다.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감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 두려움을 물리치는 길이다. 

그러면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우리에겐 연습이 필요하다. 이기는 연습. 전투에서 이겨본 사람만이 이기는 게 뭔지를 알기 때문이다. 내 자신을 이기는 연습이다. 성취감을 맛보고 작은 열매를 따는 즐거움을 아는 연습이다. 이기는 것도 습관, 지는 것도 습관이므로 우리는 이기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일주일에 두 번 운동하기, 하루에 한 꼭지씩 영어 신문 보기, 일요일 아침 일찍 시작하기, 술은 한 달에 한 번만 등. 본인의 낡은 습관을 관찰하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생산적인 방향으로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보자.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 낡음을 극복하는 경험을 하다 보면,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어느새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두려움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관념이 만들어내는 실체없는 공포임을 명심하자.

34. 동정: 자기와 동일시되는 사람의 불행을 이해하고 함께 슬퍼하는 느낌.
우리는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려는 경향이 있다. 비슷한 관심사, 비슷한 나이또래, 같은 학교와 고향. 그런 사람들과 우리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조금 더 잘 통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동정의 감정은 그러한 연대감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연대감을 가지는 대상에 해악을 끼치는 자에게 향하는 감정이 '분노'라면, 동정의 감정은 그 해악을 당한 자에게로 향하는 감정이다. 동정의 감정은 상대방과 나를 동일시 한다는 측면에서 '연민'과는 구별된다. 최근 어느 대기업에서 수천명 규모의 구조조정을 단행했을 때, 구조조정의 대상이 됐던 비슷한 또래의 직장인들은 아마도 동정심을 느꼈을 것이다. 자기 들에게도 같은 상황이 닥치지 말란 법이 없을 테니 말이다. 동정심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일깨우기도 한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누군가의 슬픔을 공감하며 한편으로는 나의 처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같은 슬픔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 중 누군가는 또 하나의 방어기재를 몸에 두르고 있을 터이다. 그렇게 동정심은 슬픔을 통해 연대감을 확인하는 감정이지만, 동시에 나의 생존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35. 공손: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마음.
공손함에는 두가지가 있다. 참 공손함과 거짓 공손함이다. 참 공손함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마음으로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세를 낮춰 겸손할 줄 알는 사람은 그 겸손함이 몸을 통해 베어 나온다. 거짓 공손함은 그가 가진 위선의 일부에 다름 아니다. 거짓 공손함은 인간에 대한 예의 보다는 나보다 누가 더 권력이 있는 가에 따라 표현된다. 그 사람이 자신보다 윗사람에게 대하는 모습과 아랫사람에게 대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진짜 공손함인지 거짓 공손함인지 알 수 있다. 이해 관계에 따라 대상에게 대하는 모습이 달라지는 부류의 사람들을 조심하자. 언제 그들이 당신을 배반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공손함은 우리가 같은 편에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며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공손함은 마음의 벽을 허물게 하고 그 자리에 신뢰를 쌓는다. 공손한 이들은 적을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늘 먼저 자세를 낮추기 때문이다. 다만, 공손함과 복종심을 구분하자. 공손함은 상대방의 의견에 반대할 때 조차도 예의를 잃지 않는 것인 반면, 복종심은 상대방의 의견이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나보다 더 높은 자에게 무조건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36. 미움: 내안에 또 다른 나.
미움의 감정은 미움의 대상이 내 맘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길을 걷다가도, 자다가도, 음악을 듣다가도 미움의 대상은 시시때때로 마음을 혼란케 하고 평정심을 잃게 한다. 미움의 감정이 자주 되살아 날 수록 대상은 내 맘안에 점점 더 강하게 자리잡는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집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음속의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지만, 미워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마음을 파괴한다. 그렇게 우리는 미움의 대상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파괴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 마음속에 미움의 대상을 고착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나 아닌 그 누구도 내 마음속에 그런 존재를 넣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 미움의 대상을 쉽사리 꺼내 놓을 수도 없다. 꺼내려 할 수록 그 대상은 내 맘 더욱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리고 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그에 대한 감정은 미움을 넘어 증오로 진화한다. 

당신의 마음속에 미움의 대상이 있는가.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잠을 설치게 하는 자가 있는가. 행여 그를 용서하려 노력하지 마라. 용서하려 할 수록 더욱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를 마음속에서 꺼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집중할 다른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일일 수도 있고, 공부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다보면 마음속에서 그의 잔상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아이러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잊는 법과 사랑하는 사람을 잊는 법이 닮아 있다는 것이.


Red Mouse

2014년 5월 17일 토요일

[도서리뷰] 감정수업(2)


이번 포스팅은 강신주님의 감정수업을 읽고 올리는 두 번째 글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내 안의 다양한 감정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그 감정들 하나 하나가 내가 세상을 대하는 시각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들을 하나씩 정리해가는 과정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아직도 정리할 감정들이 많이 남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되짚어볼 생각이다.

이 글은 전적으로 나의 시각이므로, 감정수업에서 다루고 있는 실제 내용과 같을 수도, 많이 다를 수도 있으니 읽는 분들이 오해 없으시길.

열세 번째 감정에서 스물 네번째 감정까지:

13.
 당황: 사물에 대한 믿음과 실제 모습 사이의 부조리로 어쩌지 못하는 감정.
때로는, 아니 어쩌면 자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상이 실제의 그것과 다름을 목도한다. 그 대상은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타인의 모습일 수도 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많은 것을 재단하며 살고 있다. 이것은 이런거고 저것은 저런거고. 살만큼 산 우리는 이제 첫 인상만 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살만큼 산 우리는 이제 나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 알고 있다. 그런데... 착각이다. 나를 안다는 것이 사실은 착각이었고, 그래서 남을 안다는 것은 더더욱 착각이다. 

당황이라는 감정을 통해 우리는 이제 새로운 모습에 눈을 뜬다. 그 새로운 모습이 우리를 더 기쁘게 할 수도 더 실망스럽게 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어차피 인간은, 애초부터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냥 가슴으로 느끼면 되는 존재였으니까.

14. 경멸: 대상에게 품고 있는 이상과 현실간의 괴리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부정하게 되는 감정
대상에 대한 경멸은 그 대상에 대한 기대를 동반한다. 경멸의 감정은 그 대상이 마땅히 보여줘야 하는 당위적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될 때 생기기 때문이다. 한 인간은 그가 처한 컨텍스트로 규정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 딸이자 선배, 후배이고, 남자, 여자이며 아빠이고 엄마이다. 우리의 사회적 지위도 그 컨텍스트에 포함된다. 이러한 컨텍스트가 우리에 대한 당위적 기대를 만든다. 경멸의 감정은 그 기대감이 무너지고 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솟아난다. 경멸의 감정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방을 부정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경멸의 감정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상대방을 비루하게 만들며 또한 주저앉은 인간을 회복하기 힘든 정신적 불구로 만든다. 그런데, 상대방에 대한 경멸은 필연적으로 나에게도 상처를 준다. 경멸의 감정에 휩싸인 나와 그 대상인 상대방은 '관계'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옆 사람이 흔들리면 나도 흔들리는 것. 관계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경멸하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모두의 공멸을 의미한다. 상대방을 존중해 줄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그냥 헤어지자. 관계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 것 만큼이나, 문제를 어떻게 푸는 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15. 잔혹함: 대상에게 해악을 가하도록 스스로를 자극하는 감정
인간관계에서는 만나는 과정 만큼이나 헤어지는 과정도 중요하다. 어떻게 헤어지는 가에 따라,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는 가에 따라 다음에 올 만남이 좀 더 성숙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잔혹함은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 존재하는 상대방을 애써 밀어내려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혼자의 힘으로 상대방을 밀어낼 수 없을 때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떠나게 하는 것. 나약한 우리는 그래서 잔혹해진다. 하지만 그 잔혹함의 칼날은 한바퀴를 돌아 결국은 자신을 베고 만다. 깊은 상처를 입고 떠나는 그와 그를 보고 연민을 느끼는 나. 다시는 이런 만남을 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늘 원형 경기장의 같은 트랙을 따라 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16. 욕망: 인간의 본질적 자아
인간의 욕망은 본능과는 다르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본능'이라면, 욕망은 그 위에 자리한다. 부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섹스에 대한 욕망. 이러한 욕망들은 본능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그 자체로 우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탐욕'은 이러한 욕망들에 우리가 중독되는 것이다. 욕망은 때때로 사회적 가치와 충돌한다.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은 속물로 낙인 찍히고 사회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군중속에 있을 때 욕망을 드러내기를 두려워 한다. 그렇게 욕망은 언제 부턴가 우리가 감추고 싶어하는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결국 '욕망'이다. 우리가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을 보고 욕을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모습속에서 나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을 본능의 레벨로 끌어내리지 않고, 성취를 위한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취하지 않고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욕망이 이성의 도움으로 균형을 잡을 때 우리는 내 안의 욕망에 좀 더 관대해 질 수 있지 않을까. 

17. 동경:  좋아하는 어떤 것을 내 안에 머무르게 하고 싶은 욕망
나는 무엇을 동경하는가? 나의 유년시절? 낯선 외국땅에서의 낭만적인 삶? 멋진 이성과의 데이트? 동경의 대상은 어떤 구체적인 사물일 수도 또는 추상적인 관념일 수도 있는 그 무엇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다. 그 대상이 주는 행복감은 나의 마음을 따사롭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내가 가질 수 없는 대상이기에 슬픔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동경하는 것은 삶의 거친 파도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마음을 정박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은 언젠가 다시 길을 떠나야 함을 전제로 하는 쉼이어야 한다. 영원히 뭔가를 동경하는 마음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이내 끝없는 슬픔과 자괴감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경은 반드시 슬픔이나 자괴감으로만 귀결될까? 
앞으로 10년 후에 당신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서 있고 싶은가? 수많은 군중 앞에서 스피치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동경해 보면 어떨까? 화가나 작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낸 자신의 모습을 동경해 보면 어떨까? 전 세계를 누비며 수많은 경쟁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커리어 맨/우먼은 또 어떨까? 과거나 어떤 사람에 대한 동경은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꿈을 향한 미래에 대한 동경은 때때로 우리를 설레게 할 수 도 있다. 

18. 멸시: 나를 과대평가하고 상대방을 과소평가 하는 것.
경멸이 상대방을 향한 당위적 기대감에 대한 배반감 같은 것이라면, 멸시의 감정은 상대방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존엄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이다. 모든 것의 가치가 돈과 권력에 의해  평가되버리고 마는 사회에서 우리는 이제 인간의 존엄조차 그가 가진 물질에 의해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힘없고 빽없는 이들이 가진 자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이제는 당연한 것 처럼 되었다. 정장에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갈 때와 헐렁이는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들어갈 때, 그들이 우리를 대하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 BMW 같은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과 경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과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서울 한 쪽 구석의 조그마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을 우리는 동등하게 바라보지는 않는다. 부인할 지는 몰라도, 어느새 우리 마음속에도 이미 그와 같은 속물근성이 꿈틀거리고 있다. 옷이나 가방에 가격을 매기듯이, 우리는 스스로에게 몸값을 매긴다. 그렇게 몸값 높은 우리가 몸값 낮은 상대방을 멸시한다. 멸시의 감정은 그렇게 마음의 중심을 다른 그 무엇에 장악 당했을 때 생긴다. 사람의 존엄을 빼앗는 것. 마음의 중심을 빼앗기는 것은 탐욕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내려놓을 수록 행복하다.

19. 절망: 실낱같은 희망조차 사라지고 막연한 공포가 현실이 되었을 때 느껴지는 감정.
사랑하는 사람이 하루 하루 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가슴깊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처음엔 아닐 거야라며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하루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행여 전화 통화라도 하게 되면 애써 아무일 없다는 듯 밝은 목소리로 어두운 마음을 감춰본다. 결국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이 확인될 때 조차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낱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마음을 돌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 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그 실낱 같았던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 한 번 절망을 경험한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절망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직장을 잃고 아무곳도 갈 곳이 없을 때, 모든 것을 잃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때...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이 다시 날아오르는 경험을 할까.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다시 직장을 구했을 때, 땀흘려 열심히 일 해 차근 차근 모든 빚을 갚았을 때...

절망이라는 감정은 우리를 비탄에 빠지게 하고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이게 하지만, 그래서 절망이라는 감정은 우리를 또한 살아있게 한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은 없음을 막연하게 믿고 사는 존재. 내려가지 않으면 올라갈 곳도 없지 않은가. 

20. 음주욕: 술에 대한 지나친 사랑
음주는 즐겁다. 술 때문이 아니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취하는 것은 즐겁다. 술 때문이 아니다. 취중진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술을 통해 좋아하는 사람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춤과 노래로 채우며 또 하나의 즐거운 추억을 더한다. 그런데 언제 부턴가 음주가 즐겁지 않다. 더 이상 그 안에 내가 없기 때문이다. 나 대신 술이 있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시고 있다. 술 잔에 나를 담지 않으니, 취중진담도 없다. 나를 잃은 술잔은 가슴 속에 깊은 감정의 골짜기를 만든다. 혼자만의 감정에 취하며 우리는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세상을 한탄하며, 나의 지금을 한탄하며,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비루함을 저주한다. 그리고, 다시 그 감정에 취하고 감정을 소모한다. 술이란 그런 것이다. 

21. 과대평가: 대상을 정상적인 것 이상으로 바라보는 것.
누군가를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바라본 적이 있는가. 그 누군가는 당신이 가슴 속 깊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당신이 존경할 만 한 멘토일 수도, 아니면 단순히 잘 생기거나 예쁜 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과 함께 알고 지낸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봐주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과대평가하는 것 또는 과대평가 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 대상이 내가 욕망하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기에 그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의 욕망을 채우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평가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그 하나 하나가 유일한 개체이므로 비교대상이 없는 것이다. 비교할 수 없으니 애초에 평가도 불가능하다. 내가 바라보는 그 사람의 좋은 점이 다른 이의 시각에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과대평가는 결국, 그 사람을 향한 좋은 감정에 다름 아니다. 그 사람을 꼭대기에 올려놓았으니, 이제 내려오는 길만 남았다. 우리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앞으로 그 사람을 통해 목도하게 될 실망감을. 이런 감정이란 참으로 부질없지 않은가.

22. 호의: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감정.
버스나 지하철에서 어르신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길을 걷다가 앞선 사람이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주는 것.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선뜻 다가가 도움을 주는 것. 호의를 보이는 것은 관계의 시작을 의미한다. 호의의 감정은 내가 당신의 편임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도 무심한 얼굴로 어깨를 스쳤을 수 많은 사람들. 그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를 호의라는 감정은 만들어준다. 내가 사실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상대방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 처럼 상대방도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것. 호의라는 감정은 그런 존중의 표현이다. 호의를 통해 우리가 상대방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은 나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을 위선의 가면 그 가장 겉에 드러나있는 선한 얼굴인지도 모른다. 나의 가장 추한 모습을 용서해 줄 수 있을 만큼 관계가 진전되기 전까지 그에게 각인 시키고 싶은 나의 이미지이다. 그렇게 가장 선한 얼굴로 우리는 서로 간의 벽을 허문다. 

23. 환희: 기대했던 이상의 결과에 대해 느끼는 감정
당신은 어떤 기대를 안고 사는가? 애인에게, 오랜 친구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환희의 감정은 기대감에 반비례한다. 환희의 감정은 종종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으로 부터 찾아온다. 나의 생일 인지도 몰랐는데 생일 선물을 받게 되었다거나, 퇴근길에 별 기대없이 구입했던 복권이 당첨되었다거나 하는 등이다. 그러나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은 우리 일상에서 그리 자주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환희의 감정이란 오랜 도전 끝에 마침내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냈을 때 느끼는 성취감 같은 것이 아닐까. 등반가들이 정상에 섰을 때 느낄 짧은 환희를 맛보기 위해 그렇게도 오랜시간 산을 타는 것 처럼, 아이돌들이 무대에 서는 환희를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무대 뒤에서 땀을 흘리는 것 처럼, 우리 삶도 어쩌면 그런 짧은 환희의 순간을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느새 '예측 가능한 환희'에 익숙해 져 있다. 

그러나 본래 환희의 감정이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어둠으로 부터 솟아오르는 따사로운 빛과도 같은 것이다. 환희의 감정에 친숙한 사람의 마음은 시인의 마음과도 같다. 봄에 피는 꽃과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시를 노래하는 사람들. 자연의 가장 미세한 움직임에 조차 반응하는 그들의 감수성. 인간관계에서 이러한 감수성을 가지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 고되지 않은가. 사람에게 감동하기엔 우리는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으며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에 대한 기대를 낮추며 살고 있다. 환희를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이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무관심해지고 있다. 내 갈 길이 바빠서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가 두려우니까. 인간에게 환희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하나의 부질없는 '동경'이 아닐까.

24. 영광: 타인으로부터 얻게 되는 존경에 대해 가지게 되는 기쁨.
영광은 주인공이 된 자 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다. 영광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주인공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주인공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을 경쟁을 통해 마침내 얻은 자 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광은 자기 만족의 감정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봐 줌으로써 생기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토록 영광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걸까. 나의 존재를 타인의 가슴에 새기게 한다는 것. 나에 대한 기억을 타인의 뇌리에 남게 한다는 것. 그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남길 수 최고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그 기억이 역사에 아로새겨 지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여하간 우리는 그렇게 이름을 남기는 데에 집착하곤 한다. 인간에게 가치있는 삶이란 그렇게 다른 사람의 가슴에 남는 삶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관계를 타고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고 그 안에서 성장한다. 태어나면서 시작된 우리의 관계 그물망은 팽창과 축소를 거듭하며 죽을 때 까지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영광의 순간은 그 관계 그물망에서 우리의 영향력이 증가할 것임을 예고한다. 사람들의 가운데 우뚝 서 고자 하는 욕망. 영광의 감정은 그 욕망이 이루어 졌음을 의미한다.


Red Mouse




2014년 5월 13일 화요일

[도서리뷰] 감정수업(1)


강신주 님의 감정수업이 나의 감정을 자극했다. 스피노자라는 철학자가 정의한 48가지 감정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니, 어쩌면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을 다양한 감정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그동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에만 집착해 오던 나의 감성을 깨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지금 현재도 다양한 상황에 처해 있는 나의 감정 상태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더불어 조금은 더 나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감정과 이성의 존재는 그 어느 것이 다른 것을 지배하고 지배당해야 하는 관계가 아닌, 그 자체로서 오랫동안 진화된 인류의 자산이고 그 둘이 서로 간의 균형점을 찾을 때 적어도 현재의 관점에서 만큼은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강신주 님의 감정수업을 받은 학생의 입장에서 작가가 언급한 각각의 감정을 나의 수준과 눈높이에서 다시 리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전적으로 나의 시각이므로 감정수업에서 다루고 있는 실제 내용과 같을 수도, 많이 다를 수 있으니 읽는 분들이 오해없으시길. 

첫번째 감정에서 열두번째 감정까지:

1. 비루함: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비하하는 감정.
당신은 전신을 비추는 오목한 거울 앞에 서 본적이 있는가. 오목한 거울앞에 서면 누구나 왜소하게 찌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비루함은 그렇게 오목한 거울이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이 실제의 모습이라고 믿어 버리는 것과 같다. 과거에 많은 실패를 경험하거나 성장과정에서 많은 억눌림을 당하며 자란 사람들. 그것을 올바르게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반복된 슬픔이 고착되어 자신을 비추는 오목거울이 된다. 비루함의 감정에 둘러싸여있는 사람은 무슨 일에든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고 그에 따른 성취감도 낮기 마련이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본인의 존재가 본인에게 뿐 아니라 주변에게 까지 얼마나 유의미한 존재인지를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작은 목표를 설정하고 한 번에 하나씩 작은 성취를 이루어 가는 연습을 통해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끊임없는 간섭이 아닌 관심이 필요하다. 

2. 자긍심: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 감정.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타인의 신뢰를 이끌어 낸다. 그리고 타인의 신뢰는 다시금 우리의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 자긍심으로 나와 타인사이의 긍정의 에너지가 상호작용하여 관계의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자긍심을 가지는 사람은 비루함을 느끼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본인이 가진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관찰한다. 그러나, 이번엔 다른 거울이다.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그 거울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빚어지긴 하지만 꼭 절대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거울은 각자의 마인드 콘트롤과 같은 훈련을 통해서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거울을 빚어내는가 하는 것은, 어쩌면 나를 둘러싼 환경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관한 개인적 역량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다만, 성장과정에서 누군가가 조금 도와준다면 더욱 수월해질 수 있지 않을까. 비루함과 자긍심은 마음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니, 결국은 종이 한장 차이일 뿐이지 않을까.

3. 경탄: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어떤 사물을 바라보는 감정.
경탄의 대상은 그 자체로 신비함이기도 하다. 가까이 하고 싶지만 눈이 부셔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존재. 하지만, 끊임없이 가까이 다가가고픈 존재.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인간관계에서 경탄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서의 노력은 경탄의 대상이 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스스로를 갈고 닦아 완성된 인간으로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노력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말보다는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는 그 누군가를 늘 갈구한다. 그러한 자극을 통해 우리가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경탄의 대상이 되어 자극을 교환하고 성장할 수 있다면, 친구로서, 애인으로서, 스승과 제자로서 그보다 더 좋은 관계가 또 있을까.

4. 경쟁심: 동일한 무엇에 대한 서로 다른 사람의 욕망.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일까. 우리는 늘 타인을 통해 나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경쟁은 희소한 가치를 가운데 놓고 이루어진다. 아무곳에나 널려있는 그 무엇이라면, 무엇하러 경쟁을 하겠는가. 희소가치가 높을수록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그 희소한 가치를 쟁취했을 때 함께 얻게되는 명성. 경쟁심의 이면에는 타인으로부터 주목받음으로서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지금, 그러한 주목받음(다른 말로 '인기')이 돈으로 환산되는, 아주 재미진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인기도 얻고, 돈도 벌고.. (종종 경쟁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안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경쟁심은 서로 다른 사람이 상호작용 하는 또 하나의 채널이 되기도 한다. 동일한 뭔가를 놓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보다 나은 상대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느낀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어느새 동지애로 발전하기도 한다. 경쟁을 한다는 것은 동일한 목표를 두고 동일한 시공을 공유하는 것이다. 마라톤에 페이스 메이커가 있듯, 나혼자 달리는 것 보다 경쟁자와 함께 달리는 것이 목표달성에 더욱 유리하다. 인간관계에서 경쟁심은 서로가 발전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도구일 수 있다. 다만, 그 경쟁심을 왜곡시키지 말자. 목표라는 결과를 경쟁이라는 과정보다 절대적으로 우선 시 할 때 경쟁심의 순수성은 왜곡되고 그 잠재력은 빛을 잃는다. 한번 경쟁심이 왜곡되어 규칙을 잃은 두 욕망이 끝없이 부딪힐 때 우리는 모두 패배자가 될 뿐이다.

5. 야심: 유명해지려는 욕망.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은 남이 바라봐 주는 주인공이 되는 욕망을 한 번쯤은 가질 터. 그러나, 인간은 결국 사회적 동물이기에, 야심을 품는 자체로 질타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야심을 위해 타인과 경쟁을 하는 것은 어쩌면 보다 나은 우리가 되기 위한 미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야심이 향하는 그 끝이,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해 있다면 그 과정 자체가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경우 야심이 향하는 곳은 자본주의 사회가 성공이라고 일컫는 그런 것들, 이를 테면, 돈과 명예, 권력 따위의 것들이다. 인생에서 돈과 명예, 권력을 거머쥐고 마침내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행복할까. 헤어릴 수 없이 많은 돈을 자식들에게 남기고 간 어느 재벌과, 서울역에서 쓸쓸히 죽어간 어느 한 노인의 죽음 사이의 차이점은 뭘까. 그 둘의 인생 가운데 어느 인생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돈과 명예, 권력에 대한 야심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야 할까. 그 돈과 명예, 권력이 야심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목표가 되는 한, 우리의 삶은 별로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중독된 삶은 대체로 그러하니까.

6. 사랑: 서로를 통해 비로소 충만해지는 감정.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야심을 품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것은 무슨 얘기일까. 치열한 경쟁을 통해 주인공이 되는 것. 그것은 우리가 타인으로 부터 주목받기 위한, 그러니까 아이돌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군중(친구, 비즈니스 관계, 선후배 등)들로 부터 주목 받기 위한 욕망이다. 나는 그들의 관심을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랑을 통해 주인공이 되는 것, 그것은 나의 자아를 확장함으로써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나의 자아를 넓혀 그 대상이 나에게로 들어올 수 있게 포옹하는 것이다. 군중과 내가 느슨한 관계라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매우 강한 결합관계이다. 사랑의 감정이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것은 이 강한 결합 관계에서 나온다. 믿음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로부터 등을 돌린다 하더라도, 이 사람만은 내 옆에 있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나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단점 조차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봐줄 수 있는 존재. 그것은 나보다 더 '나'인 존재. 그래서 자아의 확장으로 결합된 두 영혼은 서로를 충만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한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7. 대담함: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
대담함은 우리로 하여금 불확실한 미래에 맞서게 하는 힘이다.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또한 같은 이유로 우리를 설레게 한다. 대담함은 어쩌면 절박함에서 기인한다. 지금의 안정적인 삶이 충분히 만족스러울 때 우리는 정착한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현재의 안락한 일상을 앗아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고 의미를 잃어간다면, 미래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자 긴 터널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다. 그래서 대담함은 현재의 상태를 바꾸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다. 위험할 수도 있고, 고될수도 있음을 알고 있지만, 선택하지 않으면 안될 때. 궁지에 몰린 자의 생존본능이 두려운 마음의 상태를 대담함으로 바꾼다. 대담함을 무모함과는 구분하자. 무모함은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는 도전인 것에 비해, 대담함은 미래를 바꾸는 힘이니까.

8. 탐욕: 물질에 대한 중독. 
인류에게 소유의 개념이 생기기 전에는 어쩌면 탐욕의 개념이 없었을런지도 모르겠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이 우리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옷, 더 좋은 핸드백을 소유하고 있는 자가 '갑'이다.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성공'한 자들은 그렇게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고, '성공'하지 못한 자들의 어깨는 늘 무겁다. 처음엔 생존을 위해 물질을 축적하지만 많은 부가 곧 권력이라는 공식을 깨닫게 되면서 물질에 대한 욕망은 다른 차원으로 발전한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부러움과 경탄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하고 또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물질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안겨주고 경탄의 대상이 되게 하며 우리를 대담하게 하고 심지어는 이성의 사랑을 얻게도 한다. 하지만, 미안하다. 이 모든 게 착각이라서.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아닌 우리 뒤에 있는 물질이니까. 그들은 사실은 물질을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걸. 그 물질이 나에게서 빠져나가는 순간, 나는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렇게 탐욕은 나의 주인공 자리를 물질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9. 반감: 과거의 우연적 슬픔의 원인이 현재의 어떤 사물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감정.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사물에 투영된다. 인간은 과거의 상처를 반복하지 않기위해 오늘 방어기재라는 갑옷을 두르고 있다. 그 갑옷은 밖으로 부터 오는 공격을 방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안에서 분출되는 욕망도 차단한다. 반감은 그렇게 많은 상처가 겹겹이 쌓여 우리 영혼을 두르고 있는 갑옷인지도 모른다. 반감을 가지는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우리는 점점 고립되어 간다.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에 대한 반감, 문신을 한 사람에 대한 반감, 귀걸이를 한 남자에 대한 반감, 지나치게 예쁜 여자/잘생긴 남자에 대한 반감, ... 이런 반감의 감정이 들 땐,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왜 이 자를 싫어하는가 라는 질문'이 그에 대한 반감을 호감으로 바꾸는 질문이 될 지도 모른다.

10. 박애: 상대방의 상태를 공감하고 그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감정.
세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적은 인간이다. 어제 환호했던 군중이 오늘 나에게 돌을 던진다. 인간이 인간을 배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애의 감정 저 밑바닥에는 측은지심이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옛날, 어진 군주가 백성을 바라보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극우보수주의자들, 광신도들, 일베인들, 각종 범죄자들.. 그들을 바라볼 때 분노보다 슬픔과 애처로움이 느껴진다면 그것이 박애의 감정일까.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부족한 사람은 어떻게든 박애의 감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박애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니까. 왜냐면 그것은 부모의 사랑을 빼고는 유일한 조건없는 사랑이니까. 그런 사랑, 나 같은 사람이 하기엔 너무 벅차다.

11. 연민: 상대방의 불행을 이해하고 위로하고자 하는 감정.
연민의 감정은 연민의 주체가 연민의 대상보다 객관적으로 더 나은 상황에 있을 때 일어난다. 그들은 상대방의 불행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래서 그들을 위로한다. 연민은 종종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에게 힘을 주어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끔 한다. 왜냐면 상처받은 사람에게 위로는 어쨌든 약이 되는 법이니까. 하지만, 연민이라는 감정은 기울기를 따라 흐른다. 나보다 나은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연민은 고통받는 사람을 향해 내미는 위로의 손길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년소녀가장들을 위한 모금을 하고,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고, 지진이나 해일피해를 위한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우리의 많고 적은 도움을 받은 그들이 다시 잘 일어서고나면, 그래서 더이상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연민의 중심엔 인간이라는 연대의식이 자리한다. 이성에 대한 연민은 종종 사랑으로 발전한다. 연민의 기울기를 극복한 이들이 이제 수평적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12. 회한: 과거의 저지른 과오로 인한 오늘의 슬픔
살면서 누구나 많은 잘못과 시행착오를 거친다. 그리고 그런 잘못과 시행착오가 없었더라면 좀 더 나은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슬퍼한다. 하지만, 슬퍼할 것 까지는 없지 않을까. 왜냐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이니까. 역사에 'if'를 다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까. 역사가 전진과 퇴보를 반복하며 변증법적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듯이, 우리의 잘못과 시행착오, 그리고 밀려오는 후회는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성숙해 가기 위한 전진과 후퇴의 과정이다. 

회한은 그러한 잘못과 시행착오가 극복되지 못하고 계속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감정이다. 회한을 가지며 다시는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겠노라고 선언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여전히 내가 그 기억 안에 허우적 거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회한으로 인한 깊은 슬픔에 너무 자주 오랫동안 빠져있는 사람은 그러한 자기 파괴적이고 자기 비하적인 자학적 감정을 즐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회한의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력과 실행이 필요하다. 그 지나간 일들에 허허롭게 웃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과거를 극복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Red Mouse



2013년 12월 1일 일요일

소셜 네트웍 서비스: Alone Together

언제부턴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서비스에 매료되어 한참을 사용하던 중 문득 궁금해진 것들이 있었다. 소셜 네트웍 서비스를 통해 보여지는 사람들은 실제의 그들의 모습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온라인에서 만난 우리들은 서로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오프라인 삶 속에 존재할 사람들의 다면적 인격을 그들의 온라인 캐틱터는 얼마나 반영하고 있을까? 그들간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Alone Together를 통해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몇 가지의 물음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사실 Alone Together는 기술의 진보에 따라 인간의 행동양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여러가지 실험을 통해 논증하고 객관화 한다. Alone Together의 저자, Sherry Turkle는 이러한 기술의 진보에 따른 인간의 행동양식의 변화가 우리가 그동안 지켜왔던 소중한 가치들을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꼬집고, 기술의 발전이 인류가 지키고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강화하는 쪽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오프라인의 다면적 자아와 온라인의 정제된 자아

Alone Together에서는 사용자가 온라인을 통해 본인이 원하는 실제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고 한다. 온라인에서는 내가 원하는 형태의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새로운 글을 올렸을 때, 아바타의 모습을 바꿨을 때, 사진을 올렸을 때 주변에서 보이는 반응에 따라 좀 더 많이 주목받을 수 있고 인기를 끌 수 있도록 노력한다. 사용자에 따라서는 좀 더 이지적인 모습으로, 또는 재미있고 유머러스한 모습으로, 또는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밖으로 비춰질 수 있기를 원한다. 오프라인에서 잘 안되는 것들을 온라인을 통해 '성취'함으로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는 면도 있을 것이다. 온라인에서는 오프라인과는 달리 실시간적 대응이 필요없고 따라서 누군가에 대한 본인의 반응을 충분히 고민하고 정제할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목적의식적 '치장'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점점 비실시간적이면서 통제가 가능한 온라인 삶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SNS 사용자들은 그 목적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디자인한다. 어떤 사람들은 친목을 목적으로 가까운 지인들만을 대상으로 개인의 정보를 공유하고 어떤 사람들은 애초부터 Personal Branding을 목적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그들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 나름의 온라인 에티켓을 준수하며 컨텐츠를 공유한다.  

SNS와 같은 온라인 도구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는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의 모습을 궁금해하는 것 만큼이나 개인적인 관심사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주말 오후 강남거리를 아무리 잘 차려입고 걸어다녀도 아무도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것 만큼이나 온라인에서도 보통사람들의 존재란 단지 끝없이 올라가는 타임라인 가운데 단 한 줄 만큼 정도의 무게일 뿐이다. 일상에서의 스타는 온라인에도 스타다. 일상에서의 보통사람은 온라인에서도 보통사람일 뿐이다. 대부분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온라인의 자아를 예쁘고 단아하게 때로는 섹시하게 치장함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주목받고 싶어한다. 우리는 공감 받고 싶어한다. 오프라인의 삶은 그렇게 온라인의 자아에 투영되고 있다. 


감성적 연결의 다변화

Alone Together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로봇을 통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실험을 통해 밝히고있다. 이 가능성을 바탕으로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다양하게 출시되고 있으며, 그 기술 자체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때때로 이러한 종류의 로봇은 인간의 관점에서 더 이상 무감정 무감각의 로봇이 아닌, 고양이나 개와 같은 살아있는 개체처럼 인지되고 있다. 로봇이 사실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조합일 뿐이라는 사실은 그런 로봇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겐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어쨌든 로봇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통해 인간이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정작 중요한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러나, 그런 현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어쩌면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기준은 그 대상이 실제인지 허구인지와는 관계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우미 로봇은 인간의 말을 인식하고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설계되었으며 인간과는 달리 화를 내거나 귀찮아하지 않는다. 사람은 헌신적인 로봇과 일정기간 교류함으로써 점차 로봇에 대해 감성적 연결고리를 맺게 된다. 적절하게 프로그래밍된, 제한된 언어만을 구사할 수 있을 뿐인 도우미 로봇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될 때 그들은 더 이상 로봇이 아닌 것이다. 

SNS와 같은 온라인의 삶에서는 어떨까. 우리는 우리가 올린 글에 대해 다른 사람이 반응할 때 만족감을 느낀다. 누군가가 나의 트윗을 리트윗하거나 나의 글을 like하거나 공유할 때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 그것은 나의 '실존'을 타인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이다. 왠지 어느 정도 오프라인의 그것과 닮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SNS를 이용하면서부터 어쩌면 우리는 더이상 관계유지를 위해 시간을 내어 장소를 이동하고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always-on network을 통해 공간을 뛰어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연결을 통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흔적을 남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전처럼 서로 얼굴을 맞대거나 전화를 통해 음성을 들었을 때만 감성적 연결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신뢰

SNS를 통해 가지는 감성적 연결이 오프라인에서도 이어질까. 온라인에서 느끼는 친밀감 만큼이나 우리는 오프라인에서도 가까울까. 온라인을 통해 느끼는 누군가에 대한 신뢰가 여전히 오프라인에서도 유효할까. 오프라인의 관계에서만큼이나 온라인 관계에서도 상호침투(reciprosity)가 가능할까. 

트위터는 사용자간 "Follwing"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사용자는 유명 연예인이나 관심분야의 유명인이 tweet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고 그 얘기들에 실시간으로 반응한다. 문득 Reply나 멘션을 통해 그들과 1:1의 메세지를 주고 받기라도 하면 마치 그들이 자신의 일상안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페이스북도 마찬가지 맥락에 있다. 사용자들은 페이스북에서 서로 간에 Friends를 맺고 그들간 올리는 컨텐츠를 서로 공유하며 그렇게 공유된 컨텐츠에 반응함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 책의 저자인 Sherry Turkle는 자신의 TED 강연에서 이렇게 SNS가 제공하는 약한 연결을 통해 사람들은 감성적 연결고리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싶어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친구들과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을 하고 트위터를 통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소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아이러니다. 함께 있지만 혼자 있는 것이다(Alone Together).

사람들은 SNS를 통해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 SNS를 통해 연결된 감성적 연결고리가 그들의 네트웍이라고 믿고 있다. 맞지만 틀린 얘기다. Sherry Turkle 의 지적대로 그런 연결고리는 "mere connection"일 뿐, 그 연결이 서로 간의 신뢰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알게 된 사람과 직접 1:1로 만나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알게된 사람으로부터 직접 1:1 연락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이럴 때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또한 그들의 반응은 어떨까? 늘 그렇듯,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경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나의 '적'이 될지 '동지'가 될지를 탐색하는 것은 인류가 생긴이래 가장 오래된 인간의 본능이니까. 내가 올리는 Like나 공유의 횟수가 오프라인에서 나와 그들간의 신뢰적 관계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SNS에 아무리 많은 친구가 있고 SNS를 통해 아무리 많은 활동을 한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간의 높은 벽을 무너뜨리지는 못하고 있다.

페이스북의 전세계 사용자는 2013년 말 현재 12.5억으로 알려져 있고, 아주 최근 10대 사용자의 유출이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가장 넓은 충성도 높은 사용자층을 가지고 있다. 트위터는 active user 관련 논란이 있긴 하지만, 역시 대안 미디어로서의 입지를 이미 굳히고 있다. 스마트폰 기반의 서비스들이 소셜 그래프를 통해 사용자의 충성도를 제고하고 전환비용을 높이려는 노력은 이제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서비스의 다양한 소셜 그래프위에 크라우드 소싱이나 P2P 공유 경제와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들이 등장하고 있고 소셜 그래프를 이용해 특정 사용자에 대한 신뢰도를 측정하려는 노력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맺음말

다양한 SNS의 진화로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것들을 다양한 형태로 공유할 수 있게 된 지금, 이제는 좀 더 본질적인 물음을 던져볼 시기인 것 같다.

나의 소셜 그래프에 있는 사람들을 나는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나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들과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낯선 사람을 잠재적인 '적'이 아닌 잠재적인 '동지'로 인지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각 개인의 정신적 역량에 기대어 왔던 이러한 관계의 문제를 기술적 진보가 해결해 줄 수는 없을까?



Red Mouse